세계 도자사에서 한중일의 관계와 도자 교류
김재열(호암미술관 부관장)
1. 세계 도자사에서의 한·중·일
일 만년이 넘는 기나긴 세계의 도자기 역사에서 한국·중국·일본의 세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막강하다. 이들 세 나라는 세계도자사의 흐름을 주도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인정되고 있는데, 그것은 순전히 일찍부터 높은 온도에서 구운 유리질의 자기를 생산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중동지역과 이집트에서 발원하는 서양도자기들은 기본적으로 진흙질의 태토에 낮은 온도에서 구웠기 때문에 우선 단단하기가 덜 하여 실용성이 떨어지며, 설령 유약을 씌우고 여러 가지 색깔의 그림을 장식하였다 하더라도 낮은 온도에서 구사할 수밖에 없는 연유도(鉛釉陶)의 수준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는 이미 천년도 더 전에 고품질의 청자와 백자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14세기 이후에는 도자기의 생산이 백자 위주로 전환되면서 본격적인 ‘백자의 시대’를 맞이하게 되며, 일본은 16세기까지 청자의 번조에는 성공하지 못하지만 17세기 들어 조선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백자제작에 성공하면서 한?중과 나란히 도자기의 선진국 대열에 들게 된다.
한편, 중동 지방을 비롯한 서양에서는 기술적인 제약으로 인해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이룩한 고화도(高火度) 번조의 청자나 백자 등은 기본적으로 만들지는 못하였지만, 소위 ‘도자의 길’을 따라 세계 각지로 수출되어 나간 중국산 자기의 영향을 받아 이를 모방한 도기의 제작이 종종 있어왔다. 사실 중국은 세계도자사의 종주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찍부터 도자기의 기술이 발달하면서 각종의 도기와 자기를 개발하였고 이들은 조공이나 무역을 통해 해외로 퍼져나가 모든 나라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 왔다. 특히 중국은 당대(唐代, 618-907년)에 들어 서역과의 교역이 확대되어 수도 장안(長安)이 국제적인 도시의 면모를 보였으며 이 당대 후반이 시작되는 8세기 중엽 경에는 도자 산업이 크게 융성하면서 본격적으로 자기를 수출하였는데 한국과 일본은 물론 동남아 일대와 중동, 이집트까지 당의 청자와 백자가 출토된다. 이런 수출 도자기는 주로 중국의 남부지방에서 배를 통해 이루어졌는데 북쪽의 ‘실크로드’에 대해 이 항로를 ‘도자의 길’이라 부른다.
이후에도 중국자기의 해외전파는 계속되었으며 특히 14세기에 경덕진 가마에서 청화백자가 개발되고 뒤이어 상회(上繪)자기가 나오면서 유럽지역의 도자기 시장을 휩쓸게 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통해 막대한 양의 중국자기들이 유럽에 흘러 들어갔으며, 중국은 곧 도자기의 대명사로 통하였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는 중국에서 명조와 청조가 바뀌는 혼란기에 경덕진 가마가 폐쇄될 상황이 되면서 이 틈을 타서 이제 막 자기문화를 꽃 피우기 시작하던 일본의 색회(色繪)자기들이 일시적으로 유럽시장에 중국자기의 대타로 수출되면서 일본의 요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동북아시아, 주로 중국에서 수준 높은 자기문화가 유럽에 전해지면서 유럽 각지의 영주들은 막대한 경제적 이윤이 걸린 자기의 개발에 총력을 기울였는데, 당시의 자기 개발의 상황은 가히 연금술에 비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독일 ‘드레스덴’의 ‘마이센(Meissen)’ 가마에서 ‘뵈퇴거(J.F.Bottger, 1682-1719)'라는 인물이 우여곡절 끝에 자기의 번조에 성공하는데 그때가 1710년경, 18세기 초엽이었다. 물론 유럽에서 자기번조에 성공한 후에도 중국과 일본의 자기들이 계속 유럽시장에 들어갔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지에서도 연이어 자기제작에 성공하면서 19세기 들어 세계는 비로소 명실상부한 자기의 시대를 맞게 된다. 세계의 도자사는 이렇듯 고화도 자기의 번조를 목표 삼아 일로 매진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언제나 중국이 우뚝 서 있었다.
그러나 세계 도자사의 흐름에 동북아시아 삼국이 미친 영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단 기술적으로 중국자기를 따라 잡을 수 있게 된 세계 각지의 도예인들에게 새롭게 떠오른 화두(話頭)는 당연히 도자기의 예술성에 관한 것이었다. 19세기말이 되면 세기말적 상황과 겹쳐 예술 의 전 분야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나 동서양을 막론하고 창의적인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매게 된다. 이런 실험적인 사조는 20세기 초반에 걸쳐 다방면으로 나타나는데, 도자기 역시 이제는 ‘도예(陶藝)’가 되어 주로 미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여기서 우선 문제되는 것은 그때까지 도자기는 다분히 기계적으로 양산된 일종의 공장 생산품적인 성격을 띤 몰개성적인 산물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기계적인 생산품에서 벗어나 자아의 창의가 존재하면서 동시에 공예로서의 기능성을 갖춘 이상적인 도자기를 그리게 되었다. 이런 근대적인 시각에 합당하다고 떠오른 도자기가 바로 조선백자였다. 일종의 민예운동적인 성격을 지닌 새로운 도자기 상(像)으로서 갑작스레 조선, 그것도 후기의 백자들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 변화의 대표주자였던 일본의 ‘하마다 쇼지(濱田庄司, 1886-1978)’, 영국의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 1887-1979) 등이 조선백자의 세계를 모델로 한 작품들을 만들게 되고, 이는 곧 일본 도예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유럽에서도 리치의 영향으로 도예계에 새로운 한국과 일본 도자기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사실 그동안 한국 도자기들은 중국과 더불어 우수한 도자 기술과 도자 미학을 이룬 도자기 선진국이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세계의 도자기 수출시장에 참여하지 못하여 이름이 나지 못하고 그 영향력이 미미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지만 이렇게 세계 도자사의 새로운 흐름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편 일본 역시 큐슈(九州)의 ‘아리따(有田)’ 자기가 유럽시장에 진출하면서 특히 ‘가끼에몽 (?右衙門)’양식의 색회자기가 사랑을 많이 받게 되지만, 일본 고유양식의 다탕기류(茶湯器類)가 미국 등의 근, 현대 도예계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즉 이들 다탕기류는 15세기말에서 16세기에 걸친 일본의 다인(茶人)들이 소위 ‘와비(わび)’차의 이상에 맞게 그 도구들 하나 하나가 독자의 개성을 가져 그 존재를 빛나게 하여야한다는 정신에 입각하여 도자기 양식에 혁신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세계 최초로 도자기를 순수 예술적인 창조물로 인식하고 유일무쌍의 원칙에 따라 물레성형에 의한 원형(圓形)을 피하고 기하학적인 형태와 불규칙한 부정형 등 ‘파격의 미’를 추구하였다. 이렇게 고전적인 물레성형의 형태에서 벗어나 하나하나 손으로 주물러 만드는 성형기법과 이를 통해 개성적인 표현을 지향한 일본 다탕구류의 제작태도는 지금의 현대 도예,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한 도예계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보면 세계도자사의 어제와 오늘에 미친 동북아 세 나라의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래서 동북아에서 이룩한 자기문화는 인류의 고귀한 유산으로 언제나 빛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2. 동북아시아의 도자교류사
이제 동북아시아의 세 나라가 차지하는 세계 도자사상의 비중이 얼마나 큰 것임을 어느 정도는 이해되었으리라 믿는다.
다음으로 또 하나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문제는 이토록 세계 도자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중국?한국?일본이란 세 나라의 도자사를 비교해 보면, 비슷한 것도 있지만 분명 저마다의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상호 간에 교류를 통한 영향관계가 뚜렷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독창적인 도자문화를 일구어 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잘 살펴보면, 삼국간의 도자기의 특징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를 통해 각국의 문화적 특질을 보다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 도자기에 초점을 맞추어 이 문제를 보면, 우리 민족이 중국의 선진 문화를 수용하는 태도와 그것을 우리 식으로 소화하여 재생산하는 창조적 변용의 과정을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어, 한국 문화 내지는 미술 분야에서 한국적인 특질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로까지 충분히 승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우리 것이 일본에 전래되어 또 어떻게 변용되었는 지에 대해 살펴봄으로써 우리의 특질을 더욱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우리 것이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어느 정도 길라잡이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그래서 한?중?일 세 나라의 도자기 교류사를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도자기의 비교문제를 훨씬 뛰어넘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안이라고 생각된다.
아세아 대륙의 동쪽에 위치한 한?중?일 삼국은, 지정학적인 조건으로 인해 선사시대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보면 이들 관계는 마치 삼형제 같아서 중국이 큰형이고 한국이 중간이고 일본이 막내쯤 되어, 이들이 때로는 서로 우호적이다가 때로는 싸우기도 하면서 은원(恩怨)이 교차되는 운명적인 관계를 가져왔다. 문화교류에서도 대체로 중국이 앞서고 이를 한국이 받아들이고 한국이 다시 이를 일본에 전하는 관계를 이루었는데, 일본은 한국 뿐 아니라 중국에서 직접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었지만, 한국이 일본에서 영향은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도자기 분야에서도 이런 공식은 그대로 적용되어 일단 중국의 주도하에 오랫동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각자의 도자 문화를 발달시켰다.
한국의 도자사는 중국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되어 온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대체로 한국 도자사에 중국이 결정적인 역할을 미친 것은 두 가지로 본다. 즉 우리가 ‘제1차 도자기혁명’이라 불리는 회청색경질토기(灰靑色硬質土器)의 발생에 미친 영향과 ‘제2차 도자기혁명’이라 불리는 청자와 백자 등 자기의 발생에 미친 영향이다. 그 외에도 조선백자의 성립과 청화백자의 발생, 조선후기 청화백자 등에 영향이 있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본문에 들어가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가마구조?번조방법?장식기법?가마도구 등의 기술적인 면과 기형?문양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중국의 영향에 힘입어 한국 도자사가 발전해 온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중국의 선진 기술을 그다지 큰 시차 없이 받아들이고 활용하여 우리 도자사가 전개되었는데, 처음 받아들일 때는 항상 중국 쪽 모델을 열심히 모방하려 애쓴 흔적이 역력하여 때로는 중국제와 구별이 안 갈 정도로 방불한 것도 나타나지만, 이런 상태는 얼마가지 않아 국풍화(國風化)되면서 한국식으로 바뀐다. 그리고 이런 한국적 양식이 계속되다가 다시 어느 순간에 중국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기형, 문양 등을 받아들여 우리 도자문화를 ‘업 그레이드’ 시키면서 한발 전진한다. 따라서 우리 도자사를 크게 보면 대체로 중국을 기본 모델로 하여 모방과 자기화(自己化)가 반복되면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도자기는 일본 도자기에 적지 않는 영향을 미쳤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고분시대의 ‘스에끼(須惠器)’라는 회청색경질도기의 발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점과 17세기 초에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조선의 사기장들의 노력에 의해 백자 번조에 성공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일본은 우리처럼 중간에 청자의 시대가 없으며, 바로 백자의 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중국이 한국에 미친 영향만큼이나 한국이 일본에 미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 도자사를 보면, 한국과 중국의 영향을 둘 다 받아들이면서 발전하였다. 먼저 일본은 거의 일 만년 전에 인류 최초로 토기를 만든 나라로 인정되고 있는데 대단히 독특하게 생긴 이 ‘죠몽(繩文)토기’는 거의 기원전 3세기 무렵까지 계속되었다. 이 죠몽토기 다음에 오는 것이 ‘야요이(彌生)토기’인데, 야요이 문화는 한반도의 청동기문화가 전파되어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때 한반도의 토기문화가 들어가 일본 야요이토기에 영향을 미쳐 한반도의 무문토기와 유사한 기형들이 나타난다. 이후 일본토기는 고분시대인 5세기 무렵에 한반도에서 들어온 회청색경질토기문화의 영향으로 ‘스에끼’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토기문화를 이루었다. 이후에도 일본은 한국과 중국의 영향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발전해 가는데, 크게 보아 일본은 중세 즉 우리나라의 고려에서 조선초기에 걸친 기간 동안에 청자나 백자를 만들지 못하고 회유도(灰釉陶) 수준에 머물면서 각 지역의 가마에서 아주 독특한 미감의 일본식 도기를 주로 생산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초에 조선 사기장에 의해 비로소 자기의 번조에 성공하며, 일단 조선식 기술을 토대로 자기번조에 성공한 일본은 곧이어 중국의 상회기술을 받아들여 색회자기를 개발하면서 세계 도자기의 시장에 화려하게 등장하고 이후 자체적인 기술 개발의 노력으로 일본 특유의 각종 도자기들이 생산되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항은 다완(茶碗)에 관한 것이다. 일본의 다도(茶道)는 세계적으로 유명한데, 다인들이 애용하는 다구류(茶具類) 중에 특히 다완의 선택에 매우 세심하였다. 일본의 다인들이 애용한 다완은 시대에 따라 변화를 보이지만, 주로 중국제와 한국제를 그 대상으로 삼았는데, 특히 16-17세기에는 조선의 경상도 부산 근처의 가마들에서 생산된 지방백자완들을 높이 평가하여 그것을 가져가거나 조선 조정에 특별히 주문하여 생산된 다완을 수입해 갔다. 지금 일본에서 국보로 지정된 그 유명한 ‘이도(井戶)다완’ 등이 그러한 예로 한국에서는 지방의 막사발로 보는 종류들이다. 어쨌든 일본 도자사에서 매우 소중하게 다루는 다완류 부분에서 조선의 도자기가 끼친 영향은 실로 컸음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지금까지 본 바대로 동북아시아 세 나라의 교류사를 살펴보는 것은 여러 모로 흥미로운 사안이다. 도자기의 교류라는 것이 말이나 문서로 되는 것이 아니고, 고고학적인 증거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도자기들의 기술 전파는 먼저 자국에 들어 온 실물을 접하고 사용한 사람들이 그에 심취하여 이를 모방하고자 마음먹었기에 가능하였다. 따라서 도자기의 교류사를 이해하는데 우선적으로 살펴 볼 것은 교역도자의 존재가 아닐까 싶다. 고대의 교역은 조공에 의한 공무역과 순수한 개인적 영리를 목적으로 한 사무역으로 나눠질 수 있지만, 자세한 것은 논외로 하고 이런 교역을 통해 들어온 도자기들이 사용자의 사랑을 받다가 무덤에 묻혀지기도 하고, 사용하다 깨어지면 버려지기도 하여 고대의 분묘나 생활유적에서 그 나라 것이 아닌 외국제 도자기들이 출토된다. 바로 이런 유적에서 출토한 외제 도자기들이 그 당시 도자기 교류사를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자료가 되는 것이다.